까마득히 먼 옛날. 아직 파릇파릇한 시절에 저녁마다 보라매공원에서 달리기를 했다.
집에서 보라매까지는 2.5km 남짓, 도보로 30분이상 걸리는 거리다.
허름한 동네의 골목길들 헤치고 가다보면 곧 문을 닫을 것같은 야채가게가 있었다.
야채도 별로 없었고, 가게 매대에는 몇가지 기름이나 식초들이 횡하니 진열되어 있었다.
당장 재건축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이었는데, 그 아파트는 아직도 재건축을 못하고 있다.
가게 주인은 할머니였는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. 가끔 야채 다듬는 모습을 스쳐가면서 봤을 뿐.
'이 가게에서 먹고살 매상이 나올까?. 월세라도 건질 수 있을까?'
지나칠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.
때는 여름 저녁.
평소처럼 운동을 가는데 야채 가게에 할머니가 뒷모습을 보인채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.
식탁 역할을 할 테이블이 없는지 가게 바닥에 욕실용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채였다.
밥그릇은 양푼이. 식사메뉴는 야채 비빔밥이다.
재료는 상품성이 떨어진 야채를 썼을 것이다. 가게 주인들은 으레 그렇게 자신의 상품들을 처리하니까.
아마도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그 장면을 관찰하지 못했을 것이다.
식사를 관찰하는 것은 실례일테니까.
할머니의 숟가락질은 역동적이었다.
지금도 그렇게 역동적인 동작을 본 적이 없다.
그 할머니의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.
몇 년째 늘 그대로가 아니라, 매대가 썰렁해져 가는게 눈에 보였다. 가게를 유지하는게 신기할 정도였다.
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같았다.
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꿋꿋하게 살아가셨을 것이다.
나도 그 할머니처럼 그렇게 늙어갈 수 있을까?
때때로 그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.
그리고 가끔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도 그렇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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